이야기들..

<막걸리에 관한 시 모음> 전병철의 '막걸리 예찬' 외

유서니 2010. 10. 29. 13:13

<막걸리에 관한 시 모음> 전병철의 '막걸리 예찬' 외

+ 막걸리 예찬

토종이다
텁텁한 정
질리지 않는 모습
한 번 넘어갈 때마다
모든 갈증과 스트레스가
순식간에 꿀꺽
수수한 차림새로 자리한 곳에서
더욱 다져지는 어긋난 사이도
본드같이 붙게 하는

토종이다
결코 변함없는 원앙 같은 금실(琴瑟)이다.
(전병철·시인, 1958-)


+ 막걸리 예찬

양주가 좋다하나 맥주보다 못하고
맥주가 좋다하나 소주만 못하더라.
막걸리 마시고 보니 그 중에 제일일세.

논밭에 일하다가 허리 펴고 둘러앉아
양주를 마실 건가 맥주를 마실 건가
그래도 막걸리 한 잔 천하에 일미일세.

치즈로 양주 들고 멸치로 맥주 들고
특별난 안주 없이 그대로 마시지만
푸짐한 막걸리 안주 세상에 최고일세.

넥타이 고쳐 매고 격식을 갖추면서
점잖게 마주앉아 양주를 마시지만
막걸린 풀어헤치고 마셔야 제격일세.
(유응교·시인)


+ 막걸리 頌

소주가 불이라면 막걸리는 흙이다
화끈하게 목을 태우는 맛은 소주가 났지만
아무래도 나는 흙 체질, 막걸리 편이다.

감치는 맛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텁텁하게 흐려 있어 요즘 아이들은
목 고개를 넘어 胃의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평가절하 하려 드는 것 같지만
胃를 거쳐 腸, 장을 거쳐
전국 방방곡곡에 이를 때까지
한번 기다려 보라

흐림 속의 맑음과
텁텁함 속의 개운함이 地氣를 닮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밤새도록 풍류와 담소를 쏟아도
시의 가슴 화로는 아침까지 뜨겁기만 하다.

밥 대신 먹을 수 있는 술이
이 세상에 막걸리 말고 또 있을까

오늘도 나는 해가 실풋하면 이십일 세기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뜨락에 불러놓고
맛과 영양이 고루 섞인 우리의 술
사람의 체질을 꼭 닮은 우리의 술
동동주 막걸리를 함께 들며
세계의 평화를 아리랑으로 푼다.

국경 너머엔
늙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구름처럼 모여
부러운 듯이 부러운 듯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김동호·시인, 1934-)


+ 이동 막걸리

막걸리 병 뚜껑을 열자
마침내 보골보골 차 오른다
저렇듯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숙성되어 가던,
늘 서둘러 차 오르던 욕망.
후후 불어 거품을 걷어내고
병을 뒤집어 흔든다
혼돈하듯 뒤섞인 후에야
겨우 평등해진 의식이나 관념.

서로의 눈에 제 눈을 맞추고
그 만큼의 충분한 거리로
건배를 한다
우리가 늘 미혹당하던 것들에
그 잘 삭은 것들에
문득 취한다
(김영천·시인, 1948-)


+ 막걸리                      

인사동 골목에 끼여
막걸리를 마시며 술 이야기를 했다
술이라는 게 뭐냐고
송상욱*이 눈치채고 말했다
막걸리는 누룩내가 약간 섞여야 한다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당신의 냄새가 누룩내 아니냐고
하지만 나도 그도 막걸리를 찾는 것은
아직도 놓치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젖꼭지라고
(이생진·시인, 1929-)
* 송상욱: 인사동에서 시지 <시詩>를 만드는 시인


+ 막걸리

어머니의 젖줄 같은
그윽한 정이
투박하게 배어있는
진하고 걸쭉한 물

거머리 뜯기며
진흙 창 논바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허리 참 하는 그 시간
피로와 배고픔을 채워주던
마술 같은 액체

가슴은 두근두근
순이 곁에 서면
작아지던 내가
벌컥 벌컥 한잔 들이키고
"사랑한다"며
첫사랑을 고백하게 한
사랑의 미약

부질없는 삶
낙수소리 벗삼아
머리 허연 우정을 싸잡아
어우렁더우렁 잔 부딪치는
행복한 노년의 낙
(우보 임인규·시인)


+ 막걸리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 홉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 달에 한 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 가지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천상병·시인, 1930-1993)


+ 막걸리의 추억

고양이 손도
빌려야 하는
농번기

아버지
심부름으로
노랑 주전자 들고
막걸리 사러 간다

마음씨 좋은
주인아저씨
한 주전자 가득
꾹꾹 눌러 담아준다

날씨는 덥고
땀은 비 오듯
목은 타들어 가고
입은 자연히
주전자 주둥이로 간다

한 모금 두 모금
빨다 보니
알딸딸
정신이 혼미하다

아버지께
혼날까 봐
개울물이라도
채워야지

막걸릿잔 앞에 놓고
아버지 생각에
목이 멘다.
(이문조·시인)


+ 아버지의 막걸리

저기 저 구릉
벚꽃무더기 흐벅진 골
이쯤에 서서 바라기 하는
나를, 바라다보는 사향노루
코끝에 앉은 나른한 봄의 헤픈 속
어디 어느 자리에서
그윽이 봄 향기에 취한
어린 나의 몸뚱어리 흐트러진 날
그 언덕, 아버지 목 줄기를
타고 흐르다 몸 꺾어 오르는
막걸리, 막걸리 냄새
지금 내 목 줄기를 타고 흘러드는
저 마술지팡이 끝에서
뿌려댄 봄 향기 속
아버지 두 눈과 마주하고 흥타령에
더-덩-덩 까불대던 어린 몸의 춤 속에
걸어 나오시는 아버지
걸어 들어가는 내 몸이 부딪쳐
사뭇 차 오르다
흐르는 그렁 진 눈가에
물의 보라가 일어
뚝뚝 떨어지는 낙수에
풀꽃이
정신을 아득 놓는 시간을 지나
절은 봄의 발로 건-등-건-등 걸어서 가다
아주 잊혀 기억을 벗어난
벚꽃 피어 흐드러진 그 마을
지금도
들녘을 지나 둑 언저리
풀꽃 스러진 자리에선
뒤꿈치 터져 갈라진 틈으로
흘러내리고 있을 아버지의 막걸리, 막걸리
(이진규·시인, 1964-)


+ 막걸리 서 말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지 스무 해를 넘긴
유월

막내아들 입영통지서 움켜쥐신
일흔 넘은 아버지

피비린내나는 산길을 따라 피난 가던 게
어제 같다시며
연거푸 뿜어대는 담배연기 속에
울음이 섞인 줄 알기나 했으랴

애처로움 달래주려고
시오리 떨어진 읍내 양조장에서
막걸리 서 말 사신 아버지
굽은 허리로 미는 듯 매달린 듯
리어카 뒤를 잡고
나를 앞세워 흙길 꼬부랑재 넘었다

동네 청년들이 둘러앉은 마당 멍석에
달빛마저 어슴푸레 떨리고
컬컬한 막걸리 주전자 오가며
어설픈 유행가 엇박자 가락으로
목청을 돋우던 나의 입영전야 잔치가
어제 일만 같은데...
(이춘우·사진작가 시인, 경북 영덕 출생)


+ 막걸리 우리 가락

이름도 모르는 양주를 마실 때면
이쁜 노래를 부르고 싶었고
크라운이라는 이름의 맥주를 마실 때면
배부른 노래를 부르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어울리는 소주를 마실 때면
슬픈 노래들만 저절로 흘러나왔고
가난한 농사꾼들
땅 파고 묻어 둔 밀주를 마실 때면
원망스런 세상사를 노래 부르고픈 심정이었습니다

이쁜 노래와 배부른 노래는
저 먼 사람들의 S. O. N. G. 같았고
슬픔 속에 민요가락은 ㅊ. ㅌ. ㅍ. ㅎ. 같아
마침내
슬픔과 원망의 가슴에 뭉치어
마흔 하나 音에 누웠을 때
누룩만도 못한 얼씨구가락 지화자가락

비행기 소리에 주눅이 든 할아비 앞에
제 어찌
향기 좋은 술을 마시겠습니까
컬컬한 가락으로 가슴 북돋아 지켜 온 가락
장구가락 꽹과리가락 징 - 지잉 가락
황토색 동색을 이룬 우리 술에
노랫가락 두들겨야지요
어헐씨구 지화자 춤을 추어야지요
(박영희·시인, 1962-)


+ 선생님과 막걸리

해가 중천에 있고 겨울은 시작되었다
네모난 창에 등을 대고 언덕 내리막길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앙상한 미루나무 아래로 걸어 올라오시는 선생님
필경 우리 담임 선생님이셨다
울타리도 죄다 없어진 우리 집을 묻지도 않고 찾아오신 그날
엄마는 신작로 중앙상회까지 내려가 오징어를 사왔다
콩콩 곤두박질 치는 심장은 곤로 속 심지보다 더 뜨거웠다
양조장집에 가서 막걸리를 두 됫박 넘게 받아오고
선생님은 오징어회를 맵지도 않은지 잘도 드셨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는 거지
나는 선생님이 떠난 후의 각오를 새롭게 했다
또 양은 주전자를 가지고 막걸리를 받아왔다
바닥에 쏟고 몇 번은 입을 대고 빨아먹었다
선생님은 두 번째 주전자마저 다 비우고서야 일어나셨다
무슨 말이 오갔을까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어디로든 도망쳐야 하는데
그날 밤 엄마는 아무말 없었다
그리고 한달 뒤 중학교 입학원서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날 느이 담임이 와서 가지도 않고 막걸리만 마셨는데
막걸리 잔을 비울 때마다 너는 꼭 공부시켜야 한다고 하더라
지긋지긋한 술
느 아버지도 모자라 이젠 담임까지 와서 술타령이냐

나의 은인 담임 선생님
아마 그때부터 술을 가까이 하신 것일까
슬픔의 강 너머로 나의 선생님이 손짓한다
(최나혜·시인, 강원도 화천 출생)


+ 서울막걸리

홀로 마시는
막걸리도 내게는
과분한 행복이지만

벗과 함께 마시는
막걸리 한 잔은
더욱 황홀한 기쁨이다

나를 내 동무 삼아
집에서 혼자 따라 마시는
서울막걸리는
왠지 쓸쓸한 우윳빛

하지만 벗과 눈빛 맞대고
서로의 잔에 수북히 부어주는
서울막걸리는
색깔부터 확 다르다

벗과 다정히 주고받는
투박한 술잔에 담긴
서울막걸리의 색깔은

남루한 분위기의
희뿌연 술집 조명 아래에서도
왜 그리도 눈부신지

마치 사랑하는 여인의  
뽀얀 살결 같다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막걸리에 대한 시가 이리 많을 줄이야..  오늘은 벗이랑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