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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는 빛의 고통이다/ 정호승
어느 날 책을 읽다가 이 한마디를 읽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아리고 멍해졌습니다.
더 이상 계속해서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로도 충격이 컸습니다.
이 말을 누가 한 말이라는 것은(문호 괴테가 한 말입니다만)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빛에게 고통이 있다면 바로 어둠이라고 생각했으나,
빛이 고통은 오히려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산과 바다가 산과 바다의 색깔을 내는 것이,
꽃과 노을이 꽃과 노을의 색깔을 내는 것이 모두 빛의 고통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저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빛깔이
빛에 의해 그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그 아름다운 색채를 내기 위해 빛이
그토록 고통스러웠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빛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빛깔들을 주기 위해
그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봄이 오고 여름이 오는 동안,
강과 산과 나무와 풀잎들이 연두에서 진초록으로
점점 변해가면서 저에게 그토록 아름다움을 선사한 것이
빛의 고통에 의한 것이었다니! 비행기를 탔다가
우연히 해가 지는 장엄한 광경을 보고 잠시 넋을 잃었는데,
그 찬란한 노을빛이 빛의 고통이었다니!
백두산 천지의 그 맑고 푸른 물빛이, 고비사막의 높은 모래산
그 고운 물결무늬가 빛의 고통이었다니! 저는 제가 경험한 이 지구의 모든 아름다운 풍경들이
빛의 고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각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삶을 주도하는 고통이야말로
저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색채들도 빛의 고통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보잘것없는 제가 고통에 의해 인간이라는 색깔을 지닌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도 고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름다워질 수 없습니다.
고통 없는 인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말은 고통이라는 말과 그 의미를 같이합니다.
고통이라는 말의 또 다른 낱말입니다. 사랑도 고통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이 시작되면 고통도 시작됩니다.
고통이 없으면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어느 대학의 강연장에서 강연을 하는 저에게 한 여대생이
“사랑을 하면 너무 고통스러워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그건 배고플 때 밥을 먹지 않고
배부르기를 바라는 것과 똑같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사랑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픈데 밥을 먹지 않고 어떻게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설령 밥을 먹고 배탈이 나는 고통의 시간이 있을지언정
밥은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배부를 수 있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고통을 회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고통은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고통을 피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고통스럽기만 했습니다.
가능한 한 고통을 그윽이 바라볼 수 있고 따뜻하게 어루만질 수 있는
부드러운 눈과 두터운 손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비록 차가운 눈밭이라 할지라도 가능한 한 고통을 껴안고 나뒹굴 수 있는
튼튼한 가슴과 팔다리를 지니려고 노력합니다. 고통은 어떤 의미를 찾는 순간부터 더 이상 고통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나의 고통이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때,
나의 고통이 누군가에게 사랑이 되고 존재의 의미가 될 때
그것은 오히려 감사이자 행복일 수 있습니다. 기차는 언제나 푸른 들판만 달리는 게 아니라,
어두운 터널 속을 달릴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차가 어두운 터널 속만을 영원히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차가 터널 속을 달릴 때 우리는 반드시
기차가 푸른 들판으로 다시 달려나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터널 속이라는 어둠을
받아들이고 참고 기다릴 줄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의 고통에 대해 그런 믿음을 지니고자 합니다
고통은 푸른 들판을 달리기 위해 통과해야 할 어두운 터널 속이며,
그 터널 속은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자 합니다.
그리고 고통을 받을 때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하고자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제가 이 세상에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제 매형이 부친상을 치르고 돌아와 제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더군.
죽음이란 발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다는 거야.” 그때 저는 고통에 괴로워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며,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힘과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어쩌면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이겨내는 일들로 가득 차 있을 수 있습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을 받는 것은 어쩌면 선택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고통은 관념일 수 있습니다.
실재하지 않는데 고통스럽다고 생각함으로써
고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혹시 고통이라는 관념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데 실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는 가끔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빛의 고통이 없으면 제 색깔을 낼 수 없듯이,
이 세상을 사는 우리도 고통이 없으면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만물이 색채를 지닌다는 것은 바로 고통의 빛이 있다는 증거이며,
제 삶에 고통이 있다는 것은
바로 제가 인간으로서 건강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증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호승 산문집 / 내 인생애 힘이 되어준 한마디 中
괴테 색채론中
사물의 본질을 곧바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헛된 일이다. 인간은 사물의 작용을 인식하며, 이러한 작용들의 전체 역사가 사물의 본질을 포괄한다. 예컨대, 한 인간의 성격을 추상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는 헛된 일이다. 그의 행동, 그의 업적을 총괄해 보아야 하나의 성격의 상(像)이 드러난다
괴테는 색채 현상을 밝음과 어둠의 양극적 대립 현상으로 보면서, 인간의 감각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색채 자체의 실체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이 이후 그의 색채 이론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괴테 당대는 물론 그 이후에도, 수학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한 괴테의 색채 이론은 거의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한다.
괴테는 색채 현상의 연구에 있어서 빛과 눈 사이의 연관을 중요시했으며 괴테의 인식론적 색채이론은 매우 감각적이고, 규정짓기 힘든 색채 영역을 기계적으로 단순화하지 않게 했다는데 큰 의의를 가진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색깔이 생겨난다는 괴테의 이론은 과학적 근거가 없지만 그의 색채론은 인간의 색채 인식에 대해 뉴턴이 답하지 못한 문제를 다루고, 이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다. 괴테는 감각을 매개로 하여 인간의 내부와 자연은 서로 분리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뉴튼에게 있어서 색채란 그 관찰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객관적 실체이다 그러므로 대상을 인간의 감각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파악하는 뉴튼적인 사고 방식에 괴테가 격렬한 저항감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색채 현상에 있어서의 단순한 견해 차이 정도가 아니라, 세계를 파악하는 사유 방식에 있어서의 근원적인 차이였다.
과학자들은 괴테의 이론을 인간 지성의 倒錯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혹독하게 비난하며 철저하게 배격하고 무시했지만 영국의 화가 터너는 삼원색과 보색을 강조한 괴테의 색깔이론이 뉴턴의 색깔이론보다 화가의 작업과 더 잘 부합한다고 봤으며, 색깔의 심리적 효과를 자신의 그림에 응용했을 정도로 화가들은 괴테의 색깔이론을 환영했다.
- 색채론中 일부분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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