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황경신의 슬프지만 안녕 중에서..

유서니 2011. 4. 29. 14:56

여기 하나의 풍경이 있다.  풍경은 처음부터 아름답고 고요하다.

그 풍경 속으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온다.

그는 처음부터 외롭고 쓸쓸하다. 그의 발자국 위로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고,

햇살은 젖은 모래 위로 긴 그림자를 그린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온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있는 풍경 속으로 또한 사람이 들어온다. 또 한사람은 처음부터 불안하고 사랑스럽다.

두 사람은 가끔 나란히 걷고 가끔 떨어져 걷는다. 가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기다려 주고 가끔 일부러 멀어지기도 한다.

두 사람은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다. 다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다.

한 사람이 풍경 밖으로 사라진다.  남은 한 사람은 다시 외롭고 쓸쓸하다.

그 사람도 천천히 풍경 밖으로 걸어 나간다.  풍경은 다시 아름답고 고요하다.

이것은 나의 아름답고 고요한 풍경 속으로 잠시 들어왔다가 사라진, 삶과 사랑과 세상과 슬픔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별과 사랑이 달리기 시합을 하기로 했다.
총소리가 울리고 사랑은 열심히 뛰어갔다.
하지만, 이별은 사랑이 저만치 가고 있는데도..
걸어갈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동안 부지런히 걸어온 사랑은 결승점에 거의 다 다랐다.
하지만 사랑은 너무너무 힘들어 했다.
이때 이별이 전속력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이별은..
사랑이 너무 힘들때 찾아온다..

이별이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이 끝난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막 시작될 때, 사랑이 그 정점을 향하여 솟구칠 때,
또한 사랑이 내리막길로 미친 듯이 치달을 때,
심지어 사랑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순간마다 존재하고 순간과 순간 사이에 존재한다.
만약 이별이란 것이 얌전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가
사랑이 끝난 후에 찾아오는 것이라면,
우리를 그토록 아프게 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나의 이 이론은 옳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이 끝나버린 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사람과 이별하는 일이
우리를 아프게 할 리 없으니까.
그것은 따뜻한 봄의 햇살 속을 날카롭게 통과하는,
또한 풀어헤친 방심한 옷깃 속을 파고드는,
남아 있는 겨울 같은 것이다.

매 순간 이별을 느끼기 때문에 그 사랑이 애틋하고 눈물겨운 것이고,
사랑이 그토록 소중하기 때문에
이별 또한 하나의 가슴을 충분히 망가뜨릴 만큼 잔인한 것이다.
하지만 또한 그것이 이별의 전부는 아니다.
이별은, 이별 후에도 온다.
완전히 이별한 거라고 생각한 다음,
그 이별에 대해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날들이 무수하게 반복된 후에도,
이별은 새삼스럽게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첫 번째 이별처럼 즉각적인 아픔을 동반하지는 않지만,
다른 의미에서 더욱 잔인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 속에는 역설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이를테면 겨울 속의 따뜻함 같은 것.

생각해 보면, 아름다움이란 잔인함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별에 대한 아름다운, 그래서 잔인한 이야기이다.

                                                          

 

 

어떤 종류의 괴로움은 너무나 깊어서 우리의 심장 한쪽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 상처가 언제까지나 상처로 남아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시간은 상처를 아물게 하고, 그것은 하나의 흉터로 남는다.
누구나 자신 속에 그러한 흉터를 가지고 있다.

가끔 어떤 코드에 의해 상처를 입었을 당시의 기억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새삼 괴로울 수도 있지만, 그때보다 더 괴롭지는 않다.

그러니까 상처를 입었을 때는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사실 영원에 관해 나는 할말이 없다.

깊이 생각해 본적도 없을 뿐더러 그 단어 자체는  나와 전혀 상관없고 낯설고 너무나 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영원한 사랑' 같은 것을 맹세한 적도 없었고 믿었던 적도 없다.

만약 그런 것이 이 세상에 혹은 나에게 존재한다고 해도  유한한 존재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누군가의 영혼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간절하게 믿고 싶어질 때는 있다.

그런 것이 정말 세상에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그런 건 역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흘러가고 시간은 흘러가고 사랑도 영원도 그들과 함꼐 흘러간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는 이별의 시간은 닥쳐온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별 역시 흘러간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별 후의 시간도 유유히 태연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길고 멀게 흐른다.

먼 훗날 우리는 반짝이는 기억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마치 처음부터 다른 행성에서 태어나

다른 시간속에 살았던 사람처럼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영원이란 우리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언젠가의 시간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것.   그것만이 영원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황경신 / 슬프지만 안녕